국민학교 시절, 반에서 물건이 없어지면 증거도 없이 고아 친구들부터 의심하곤 했던 기억으로 말씀이 시작됩니다. 그 친구들은 부모를 잃은 아이일 뿐 아니라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느끼는 아이들이었고, 그 외로움은 버려졌다는 아픔이었습니다. 상실은 불안과 두려움, 그리움, 분노, 죄책감으로 나타나며, 상실을 이겨낸다는 것은 아픔을 잊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안고서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이 떠나신다는 말씀에 이미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18절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은 성령님, 부활의 생명, 하나님의 거처라는 세 방향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첫째, 성령님이 우리 곁에, 우리 안에 계십니다.
상실을 이겨내는 첫걸음은 슬픔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며, 예수님은 우리가 정직한 모습으로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곁을 떠나시지만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사랑의 관계를 영원토록 이어 가십니다. 원어 '알론 ἄλλον'은 전혀 다른 분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분이 오신다는 뜻이고,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는 변호인, 위로자, 돕는 분 등으로 번역될 만큼 성령님의 사역이 넓음을 보여 줍니다. 순종은 성령님을 얻기 위해 치르는 값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 안에서 맺히는 열매이며, 우리를 붙드는 힘은 우리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끝까지 지켜지는 약속과 성령님입니다. 그러므로 슬픔 속에서 혼자 버티지 말고, 감정이 아니라 약속을 붙들며, 홀로 남겨진 이의 곁에 서 주어야 합니다. 상실이 결코 가져가지 못하는 한 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시기에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둘째, 예수님은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듣고도 제자들의 불안이 남아 있었기에, 예수님은 친히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서셨고, 고린도전서 15장이 기록한 500명이 넘는 증인이 그 약속의 성취를 보여 줍니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생명이 우리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 생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상실의 가장 깊은 곳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때문에 이제 죽음조차 우리를 주님에게서 떼어 놓지 못합니다. 20절의 "그 날"은 부활의 날이며, 그날 제자들은 성령님이 이어 주시는 하나 됨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자신들이 서로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실 앞에서 부활을 기억하고, 버려졌던 경험 때문에 홀로 버티던 마음을 내려놓은 채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며 아버지의 품에서 쉬어야 합니다.
셋째, 아버지와 아들은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십니다.
제자 유다가 왜 세상에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 나타나시는가’보다, ‘얼마나 가까이 오시는가’로 답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오시고, 아버지와 아들이 거처를 삼으신다는 세 약속은 하나의 약속을 세 방향에서 말씀하신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삶 한가운데 사시는 것입니다. '거처'(μονή)는 요한복음 14장 2절과 23절에만 나오는데,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거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집을 두신다는 점에서 고아에게도 돌아갈 집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사랑과 순종은 하나이며, 순종은 사랑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더 확실히 보여 주시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이미 안에 계신 주님께 마음을 열고, 서로를 의심하는 대신 곁에 머물러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더 이상 고아가 아니라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이며, 아픔을 안고서도 다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볼까요? 집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이나 느낌은 무엇인가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성령님 (요한복음 14:15-17)
상실 속에서도 우리를 살게 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14: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