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HqnZXiXwcRA?si=VWCYPhP1KSlax5lm&t=837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이지만, 그 깊이를 놓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 "이처럼"은 단순히 "많이"가 아니라 "이러한 방식으로, 이렇게까지, 이 정도로"라는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반역하고 필요 없다고 말하는 세상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은 따뜻한 조언이나 도덕적 가르침이 아니라, 과격하고 급진적인 사랑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도움은 "나는 기본적으로 괜찮다"는 전제에서 시작하지만, 구원은 "죽음에서 나 스스로를 살릴 수 없다"는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에는 중립 지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정죄하는 종교라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우리에게 놀라운 진리를 알려줍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8절) 여기서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는 완료 시제로, 과거에 이미 끝난 일이지만 그 상태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모든 사람은 미래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죄를 선고받았거나 유죄 확정으로 심판을 받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빛을 거부할까요? 지적인 문제나 증거 부족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19절)이기 때문입니다. 빛 앞에 서면 자신의 모든 행위가 드러나고, 폭로되고, 책망받고,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빛으로 나아온다
하지만 진리를 행하는 자는 다릅니다. 그들은 빛으로 나아옵니다 (21절). 두렵고 떨리지만, 이미 자신의 죄를 마주했고 그 죄가 다 드러났기에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감출 것이 없습니다. 빛으로 나아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빛 앞에 서면 우리의 죄, 연약함, 수치심, 실패가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의 사람은 빛이 심판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을 가져온다는 진리를 알기에 빛 앞으로 나아갑니다. 진리를 행하는 자들이 자신의 행위를 드러내는 이유는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빛으로 초청하십니다. "이처럼"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시며 빛으로 나아오라 초청하십니다. 온전한 믿음은 빛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입니다.
최근 내 삶에서 '환한 빛'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순간이나, 혹은 반대로 어두운 곳에 숨고 싶을 만큼 지쳤던 순간이 있었다면 짧게 나누어 보세요.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 (요 3:16-17)
중립 지대가 없는 믿음 (요 3:18-19)
빛으로 나아가는 용기 (요 3: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