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죄로 인해 부패하고 손상된 이 세상에서 고난을 피할 수 없이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세계보건기구의 통계에 따르면 단 한 시간 안에 약 7,300명이 죽음을 맞이하고, 그로 인해 약 65,000명이 극심한 슬픔의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현대 세속주의는 고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어떻게든 피하거나 제거하려는 데에만 집중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될 때 고난은 삶의 의미 있는 과정이 아닌 그저 제거해야 할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요한복음 9장의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의 이야기는, 고난 가운데 세상의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통해 고난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믿음의 응답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첫째, 우리는 고난에 대해 올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은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을 보며 "누구의 죄로 인한 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세계관은 "죄 없이는 죽음도 없고, 죄책 없이는 고난도 없다"는 인과응보의 논리로 고난을 죄와 직결시켰습니다. 고난의 원인을 타인의 죄에서 찾으면 남을 탓하고 억울함과 원망과 분노가 쌓이게 되고, 반대로 자신의 죄에서 찾으면 끊임없는 죄책감과 수치심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두 해석은 전혀 다른 방향처럼 보이지만 "고난은 죄의 결과"라는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단호히 말씀하시며, 눈 먼 사람과 그 부모가 평생 짊어져야 했던 사회적 낙인과 억울함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하십니다.
둘째, 우리는 고난의 원인이 아닌 목적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시며, "왜"라는 질문을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가?"라는 질문으로 전환하십니다. "왜"라는 질문은 고난의 원인을 찾으려는 질문이며, 이를 반복하다 보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고난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D. A. Carson은 "눈 먼 사람의 고난은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 밖에 있는 일도 아니다"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설계자가 아니시며, 고난을 외면하거나 방치하시는 분도 아니라 그 고난 속으로 직접 들어오셔서 선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지금 "왜"라는 질문을 내려놓지 못하는 고난이 있다면, 시선을 돌려 그 고난 속으로 찾아오시는 빛 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셋째, 세상의 빛은 믿음과 순종을 통해 새 창조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 먼 사람의 눈에 바르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던 창조의 행위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재현되는 새 창조의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고,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의 실로암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눈 먼 사람에게는 아무런 보장도 없었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그 길을 믿음으로 걸어갔고, 그 순종이 표적의 실제가 되었습니다. 조니 에릭슨 타다는 전신마비의 고난 가운데 "왜"라는 질문을 "하나님, 이 고난을 통해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로 바꾸었을 때 삶이 변화되었고, 전 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고난 속의 소망을 전하는 하나님의 역사 현장이 되었습니다. C. S. Lewis의 말처럼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깨우는 하나님의 확성기"이며,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실로암을 향해 걸어갈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새 창조의 현장이 됩니다.
살면서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아, 그때 그 일이 의미가 있었구나’라고 깨달았던 경험이 있나요?
고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요 9:1-3)
질문의 방향이 바뀔 때 (요 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