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살아나는 예수님의 일곱 번째 표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전혀 다른 두 갈래 길로 나아갔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몇몇은 그 능력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고발했습니다. 이는 증거나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 앞에서도 완악해질 수 있는 사람의 죄성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하는 71명 규모의 최고 사법 기관,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했고 대부분의 공회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모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설교는 진리 앞에서 사람의 마음이 왜 완악해질 수 있는지, 그 완악한 계획조차 하나님이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그리고 그렇게 성취된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세 가지를 살펴봅니다.
첫째, 진리를 결정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완악한 마음을 낳습니다.
공회원들은 예수님이 행한 표적 자체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 속에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제거하려던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는 자각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들의 본심은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τόπον)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는 48절 말씀에서 드러나는데, 여기서 '토폰 τόπον'은 실상 예루살렘 성전, 곧 그들 자신의 권력과 기득권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제사와 말씀 연구에 힘쓰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진리이신 예수님보다 권력과 명예와 안전이라는 우상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이천 년 전 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회의가 ‘진리를 발견하는 자리’가 아니라 ‘인간의 오만함을 관철시키는 자리’로 변질되는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결국 질문은 우리 각자에게로 향합니다. 잃어버릴까 두려워 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나만의 '토폰 τόπον'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악한 계획도 사용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18년간 대제사장직을 지켜온 노련한 정치가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유익하다"는 지극히 실용주의적인 논리로 예수님을 정치적 도구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 말이 그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예수님이 민족을 위해 그리고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위하여(ὑπέρ)'라는 단어는 제사와 희생적 죽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가야바는 정치적 희생양을 의도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 십자가의 대속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면제해 주지 않으면서도, 그 악한 의도조차 구원 계획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이 진리는 부당한 일을 당한 이들에게는 위로가 되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도 자리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는 도전이 됩니다.
셋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대속과 구원만이 아니라 교회로 하나되게 합니다.
가야바의 예언은 예수님이 민족을 대신하여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첫 번째 성취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 하나 되게 하셨다는 두 번째 성취로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를 가르던 모든 벽을 십자가에서 허무시고 배타적이던 그 자리를 열어 흩어진 자녀들을 한 몸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인종주의에 맞서 바르멘 선언을 세운 고백교회, 그리고 자신의 교수직과 생명까지 내려놓고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 되심을 지켰던 디트리히 본회퍼의 삶이 이 진리를 보여주는 실례로 제시됩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는 움켜쥐고 지켜야 할 나만의 자리란 없으며, 오직 예수님이 한 몸으로 모으신 교회 공동체만이 남습니다. 설교는 지금 우리가 붙잡고 있는 자존심과 억울함과 안전이 정말 예수님보다 소중한지 물으며, 나와 다르기에 불편한 이웃 역시 예수님이 목숨 값으로 구원하신 형제자매임을 기억하고 매일의 삶 속에서 그 자리를 내려놓기를 촉구합니다.
자신에게 소중해서 절대 남에게 양보하거나 내어주고 싶지 않은 자리(직장에서의 위치, 집에서 나만의 공간, 친구 관계 속 역할 등)가 있다면 나눠주세요. 왜 그 자리가 나에게 소중한가요?
완악한 마음의 정체 (요 11:47-48)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요 11:4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