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설교는 잠 못 이루는 밤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 우리가 불안과 근심을 어떻게 다루며 살아가는지 묻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이 조용히 머무를 줄 모르기 때문에 오락과 바쁨으로 달아난다고 진단했는데, 그런 도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잠시 가려 줄 뿐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은 죽음의 위협이 다가오던 밤, 발을 씻기시고 배신과 부인을 예고하신 직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정작 위로가 필요한 분은 예수님이셨지만, 그분은 오히려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감정을 억누르라는 명령이 아니라, 죽음과 환난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주시는 약속입니다. 설교자는 이 위로의 말씀을 따라, 우리가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세 가지로 풀어 갑니다.
첫째, 우리에게는 영원한 집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앞의 상황에서 믿음으로 시선을 옮기라고 하시며,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집은 화려한 대저택이 아니라, 저녁 무렵 골목 끝에서 보이는 따뜻한 창문의 불빛 같은 쉼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심은 버림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우리를 위해 길을 여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와서 우리를 영접하시겠다고 약속하시므로, 우리가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데리러 오십니다. 이 약속의 핵심은 장소가 아니라 그곳에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이며, 그래서 죽음과 이 땅의 좋은 것들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이 땅의 것들은 쉼터는 될 수 있어도 영원한 집은 될 수 없습니다.
둘째,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정직하게 모른다고 말한 도마에게, 예수님은 길을 설명하시는 대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답하십니다. 길을 아는 사람이 "그냥 저 따라오세요" 하며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듯, 예수님은 길을 알려 주시는 분을 넘어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십니다. 죄로 죽은 사람은 스스로 길을 만들 수 없으므로, 선행이나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 필요했습니다. 복음은 배타적이지만 그 길은 예수님이 값을 치르고 놓으신 길이며, 베드로처럼 실패한 사람과 도마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문이 열려 있습니다. 설교자는 도덕적 노력, 교회 생활, 헌신, 신학 지식이 아니라 오직 주님 한 분만 붙잡고 나아오고 있는지 묻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말처럼, 길 없이는 갈 수 없고 진리 없이는 알 수 없으며 생명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구하자, 예수님은 책망보다 아쉬움을 담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답하십니다. 오래 사역하고 섬겨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면, 일은 많이 하지만 주님은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보다 큰 일"은 예수님을 뛰어넘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가신 예수님이 보내 주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 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는 램프의 요정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 마음을 맞추고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아버지를 깊이 알아도 근심이 즉시 사라지지는 않지만, 근심이 삶의 마지막 말이 되지는 않으며 우리는 아버지를 신뢰하고 염려를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스마트폰 대신 "아버지"를 부르고, 집 노릇을 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정직하게 나아가며 더 깊이 알기를 구하십시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예수님이 앞서 길이 되어 주시며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시니, 집으로 가는 길은 이미 열렸습니다.
가장 지치고 힘든 하루를 보낸 뒤,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예: 따뜻한 음식, 가족과의 대화, 조용한 시간, 반려동물 등)
근심하는 밤, 그리고 약속 — 영원한 집 (요한복음 14:1-4)
길을 묻는 정직한 질문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4:5-6)